과거의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야스토모? 나야. 반년 만의 걸려온 전화가 반갑지도, 난데없이 이름을 불러오는 것에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입 안에 씁슬한 맛이 감돌 뿐이었다. 인터하이가 끝나고 은퇴식도 끝나 모든게 찬바람에 희미해졌을 터인데 어째서 그의 목소리는 어제처럼 생생한 것인지. 피처럼 붉은 꽃을 토해놓고 왜 그렇게 밝은 목소리인지. 내일 찾아와달라는 신카이의 부탁에 아라키타는 알겠다는 말로 짧게 통화를 끝냈다. 잠들지 못하는 긴 밤이 아라키타를 찾아왔다. 내일이면 그는 신카이를 만나야했다. 자신 때문에 죽는 남자를, 끝끝내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러 가야했다.
신카이가 입원해 있는 요양소는 외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오랫동안 낡은 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마침내 멈춰섰을 때, 정류장에서는 아라키타 단 한명만이 내렸다.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아라키타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야트막한 야산이 있고, 도로가 펼쳐진 벼랑 아래에는 파도가 부딪히고 있었다.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긴 오두막도 없고 바다를 떠도는 배 한 척도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흔한 새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살아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아라키타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저 멀리 해변가를 유심히 쳐다보면 건물 한 채가 흐릿하게 보일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오로지 요양소밖에 없는 이 곳은 저기에 살고있는 사람만큼이나 외로운 장소였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아라키타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야스토모."
어느새 도로는 벼랑을 타고내려가 작은 모래사장으로 이어져있었다. 흰 모래가 도로를 반쯤 덮은 곳에서 신카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만큼이나 가볍고 밝은 모습이었다. 예전과 별다를 것 없는 여전한 모습에 아라키타는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바다를 향해 턱짓을 한 신카이는 아라키타에게 등을 돌리고 해변을 향해 걸어갔다. 아라키타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이 창백하게 희었다. 맨발로 모래 위를 걷던 신카이는 작게 웃으면서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짜로 와줄 거라곤 생각 못했어." "뭐? 내가 급하게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 줄은 알어?" "그러고보니 수험시즌이었지. 원서는 어디로 넣었어?" "비밀이야. 후쿠쨩도 모르는걸 왜 너한테 말해야 되냐."
그것 참 너무하네. 바람이 거칠어 신카이의 웃음은 아라키타에게 제대로 닿기도 전에 바다 저편으로 날려갔다. 춥고 거센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얇은 옷자락과 바닷물이 찰싹이는 신카이의 맨발이 마음에 들지않아 아라키타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느새 소금기가 입안까지 침투했는지 침을 삼키기가 어려웠다.
"요난 대학." "응?" "요난 대학에 갈까 생각중이야." "음, 야스토모 성적으로는 조금 버겁겠다." "시끄러워. 넌 춥지도 않냐?"
아라키타는 신카이의 팔을 붙잡고 마른 해변 쪽으로 잡아당겼다. 팔이 너무 차가워 순간 놓칠 뻔 했다. 아라키타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온 신카이는 젖어든 바지 밑단을 접어올리고 발의 모래를 털었다.
"방에만 있느라 몰랐는데 벌써 가을이구나." "이제 가을도 슬슬 끝이거든?"
신카이가 입원한 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아라키타와는 다른 시간축을 사용하고 있던 신카이에게 계절의 변화라는 건 생경한 일이었다. 다시 한번 바람에 웃음 소리를 날려보낸 신카이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뒷 목을 덮었다.
"주이치는 메이소 대학이었지? 추천 입학은 2명 아니었어?"
그건 네 자리였잖아.
"……그 대학에는 내가 원하는 과가 없어." "그래? 진파치는 대학에 갈 생각은 없다고 했고…다들 흩어지게 생겼네." "그런거지. 이제 졸업이니까."
후쿠쨩은 메이소로, 나는 요난 대학에, 토도는 아마도 프로 입단. 그리고 신카이 너는…….
"야스토모." "왜, 임마." "와줘서 정말 고마워." "닭살돋는 소리 좀 하지마라."
두 사람은 말없이 해변을 거닐었다. 하늘이 흐린 탓에 바다는 희끄무레하고 칙칙한 색으로 출렁거렸고, 흉폭하게 불어닥치는 바람이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을 마구 흔들어댔다. 누군가와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무정한 풍경이었지만 신카이가 남국의 해변을 걷는 듯 더없이 평온해보였기에 아라키타는 추위를 내색하지않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쉼없이 걷던 신카이가 멈춰섰다. 발 밑을 따라가던 시선을 들어올리자 신카이의 등 너머로 요양소가 보였다. 처음에는 흐린 얼룩처럼 작았던 건물이 어느새 선명하게 가까워져 있었다. 그제서야 아라키타는 신카이가 입고있는 환자복을 깨달았다. 짧은 병문안이 끝났다.
"앞으로 30분 뒤면 버스가 올거야. 막차니까 그거 타고가." "신카이, 너는?" "나도 내일이면 퇴원. 집에 가야지." "그래." "응. 잘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고개를 끄덕여보인 아라키타는 그대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귓가를 가득 메운 바닷바람 사이로 신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스토모. 정말로 좋아했어. 사랑했었어."
신카이 너는 이 곳에. 쓸쓸하고 아름다운 곳에. 지금은 흐리고 바람이 차갑지만, 아마 하늘이 맑고 햇빛이 따뜻한 봄이 와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만 있는 외로운 곳. 간신히 고통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찾아오면 곧바로 여행을 떠나야 하는 슬픈 이들.
-야스토모? 나야. 시간나면 만나러 오지 않을래? 이제 괜찮아. ……야스토모도 나도 더 이상 힘들어 할 필요 없어.
여기에 왔던 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라키타 역시 바다에 눈물을 더하면서 돌아갔다.
삼일 후 신카이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아라키타는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받았다는 편지를 손에 쥐고 그는 다시 한번 바닷가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하늘이 맑고 높아서 모래가 눈부시게 빛났지만 바람은 여전히 거칠었다. 검은 양복에서 흰 모래를 털어낸 그는 이번에는 건물 안까지 걸어갔다.
아직 신카이의 명패가 달려있는 문 앞에서 안내원은 되돌아갔다. 몇번이고 망설인 끝에 아라키타는 문을 열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얼핏 비치는 햇살에 드러난 병실 안은 참혹했다. 사방이 온통 꽃이었다. 선혈처럼 붉은 꽃들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아라키타를 질식시켰다. 붉고 붉은 색의 꽃. 신카이의 생명을 원료삼아 피어난 꽃들, 숨겨두지 못할만큼 자라버린 감정들이 토해내는 고통들이 아라키타의 발 아래에 깔려있었다. 벽에 뭉개져 있는 붉은 손자국에서 신카이의 비명소리가 들려와 아라키타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런 병실 한가운데 흰 꽃이 피어있었다. 바닥에 흩뿌려져 뭉개지고 썩어가는 꽃들과 달리 유리병에 꽂혀있는 흰 꽃은 깨끗했다. 순수한 백색으로 이루러진 꽃잎은 블라인드를 투과한 가느다란 햇살 아래에서 투명하게 빛났다. 바람에 날리던 옷자락과 같은 덧없는 흰 색이었다.
-이제 괜찮아. 어제 흰 꽃을 피웠어. 야스토모도 나도 더 이상 힘들어 할 필요 없어.
아라키타는 떨리는 손을 뻗어 흰 꽃을 잡았다. 손에 쥐고있던 편지가 유리병에 닿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편지에는 붉은 꽃을 토해내던 신카이의 메세지가 적혀있었다.